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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요르단 이집트

#5 이스라엘 - 통곡의벽과 황금사원, 마가의방

by 아침이슬산에 2020. 1. 31.


이스라엘/요르단/이집트 여행기 #5



여행 3 일차 (4번째)

2020-01-07


유대의 슬픔 통곡의벽, 그리고 재건의 꿈 황금사원




예루살렘 성안의 구시가지를 가로 지르는 Via Doloroa, 십자가의 길을 돌아보고 나와서 점심식사를 위해 이동중

표지판을 보니 다윗박물관이라는것 같은데...몰것다




 








점심 식사후 유대인 지역을 통과하여 통곡의 벽으로 향한다

로마시대 도로라고 한다..





메노라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여 제2성전을 지으면 들어갈 촛대라고 한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 재림때 맞이할 제3 성전을 유대땅에 지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통곡의 벽 검사대 건물에 제3 성전 모형이 전시되 있다

제3성전은 유대인들이 1900여년 만에 새로 지으려는 성전을 가리킨다. 솔로몬왕이 건설했던 제1성전은 BC 587년,
바벨론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지은 제2성전은 AD 70년 모두 파괴됐다.  
“크리스천들은 예수의 십자가 피 흘림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다고 믿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동물 희생 제사를 드려야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갈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메노라 촛대의 의미 (인터넷펌)





통곡의 벽 가까이 가는 길에 멋진 쎅쏘폰 연주로 눈길을 잡은 이 있다



통곡의 벽 정문 입구





통곡의 벽


고대 유대인들이 대단히 거룩하게 여긴 곳으로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과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제2성전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유적지이다.

이 사건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으므로, 터전을 잃은 유대인들이 유적으로 남은 이 벽에 모여 통곡을 하였다고 하여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 이 벽은 이슬람의 바위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 (황금사원) 를 둘러싸는 더욱 큰 벽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관할권을 놓고 오랫동안 투쟁해왔으나, 이스라엘이 1967년 옛 예루살렘 시를 점령하면서 이곳에 대한 관할권을 차지했다.


유대인들의 성지.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제2성전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유적지이다.

이 전쟁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후 로마인들이 유대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몰아내었기 때문에 이 때부터 유대인들은 터전을 잃고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터전을 잃은 유대인들이 남아 있는 성전의 서쪽 벽에 모여 통곡을 했기 때문에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유적지의 신빙성은 전승·역사·고고학 등으로 확증되어 왔다. 이 벽을 건축한 시기는 BC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윗부분은 후대에 덧쌓아진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은 비잔틴 시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느님의 임재는 통곡의 벽을 떠나지 않는다'는 랍비들의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아랍과 유대 자료들에 의하면 638년 아랍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유대인들이 정복자들을 따라 거룩한 바위 터와 성전 뜰로 가서 잔해들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고 한다.


기도를 마친 이들은 시내버스를 많이 이용하는듯...



여러모로 민감한 지역이니 경찰인지, 군인인지 경비가 삼엄하다

이스라엘은 여자도 의무인지라...가끔 이쁜 여군들도 많이 보인다

정문으로 들어서려면 지니고 있는 가방의 엑스레이대 통과를 한후 놓여진 데크를 따라 이동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솔로몬왕은 예루살렘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성전은 전쟁 등으로 파괴되었으나, 헤로데스 왕(헤롯왕)이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재건하였다. 

이 벽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의 서쪽 일부라 여겨 '서쪽벽(Western Wall)'이라 불렸다.

성벽의 7단까지는 헤롯 시대에 쌓은것이고 그 위로 4단까지는로마시대, 그리고 그 위에 벽돌은 오스만 터키 시대에 쌓은 벽돌이라고 한다


▼ 이 광경을 보기를 참 고대했다.

위에서 내려다 보이도록 2층 높이에 이동 데크가 있어서 늘 사진에서나 보던 통곡의 벽 현장을 가슴설레며 바라본다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란 명칭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 용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하나는 예수가 죽은 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같은 비극을 지켜 본 성벽이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는 설에서 유래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이 성벽 앞에 모여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통곡의 벽은 2,000년동안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꿈의 장소이자

향의 영원한 염원을 담은 곳이...바로 이곳 통곡의 벽이다.

1967년 6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과 상대하여 6일동안 격렬하게 싸웠던 장소인데

이스라엘은 6일전쟁을 통해 구 예루살렘의 '스데반 성문'을 통과하는데 성공하고

병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도달한 목적지가 바로 '통곡의 벽'이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의 오랜 분쟁거리로 남아있다.

유대인들에게 이 벽은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의 상징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바위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 황금사원)에 속한 이슬람 성지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1929년에는 '통곡의 벽 사건'이라 불리는 폭력 및 대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통곡의 벽을 관람(?) 한후 황금사원을 보기 위해 이동이다

통곡의 벽 우측 입구를 따라 성전산에 오르면 엘악사 회교사원과 바위사원(황금돔)을  볼 수 있다




▼  황금사원 가기 직전 오른편에 보이던 곳.... 옛 성터의 기둥 주춧돌 같은것들이 많다





황금사원 (할 이크사 모스크) 정면 아래이다




 서기 638년 이곳을 통치했던 아랍인들은 성전산의 큰 바위 위에서 자신들의 최고의 선지자 모하메드가 승천했다는 전설에 따라

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바위를 종교적으로 기념 및 보존하기 위해 서기 692년 당시 예루살렘의 통치자인 압둘 말리크는

그들의 대사원을 건축하게 한다. 오늘날도 성전산 위에 우뚝 서 있어 예루살렘의 대표적 건축물이 되고 있는  "바위의 돔"이 바로 그것이다.


지름이 78피트, 높이가 108피트인 돔은 구리와 알미늄의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태양빛이 비칠 때는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반사된다.

1958~1964년 사이에 사원의 돔을 교체하면서 황금색 칠을 하여 황금사원이라고도 불린다.

모하메드가 승천했다는 바위도 이 바위사원 안에 있기 때문에 회교에서는 메카 메디나와 함께 예루살렘을 3대 성지로 꼽고 있다




최근 바위의 돔은 새 단장을 하였다 한다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650만 달러의 사재로 돔을 24K의 순금으로 씌우게 했다고....

1993년 시작된 공사는 15개월간 계속되어 1200장의 얇은 순금 판이 돔 위에 입혀져 진짜 황금의 돔이 되었다


계단을 올라 성전산에 이르는 입구에 이 아치는 ???




유대인들이 현재 이슬람교의 최대 성지인 예루살렘 모리아산 황금사원(사진) 자리에 제3성전을 짓기 원한다고...

이슬람 최대 메카인 이곳에..... ㅠㅠ



파노라마



황금사원이 있는 성선산의 서북쪽 문으로 나가기 위해 이동중




계단을 내려서며 돌아본 황금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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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원 관람을 마치고 다시 통곡의 벽으로 갔다

이번에는 통곡의 벽에 직접 들어가 기도를 하던, 구경을 하던 직접 마주하기 위함이다

아래 사진에 마주 보이는 통곡의 벽 일부가 보이고... 오른 방향이 오전에 들어갔던 정문쪽이고 2층 높이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사람도 많고 공사중이기도 하고.... 정신 없지만

직접 통곡의 벽 현장으로 간다

남자들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르고 여자들은 광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통곡의 벽 현장이다

쏠로몬 시대에 지어진 그 벽돌일까??

설레는 가슴으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만져보고 쓸어보고...... 감동이 물결친다


벽돌 틈바구니에 뿌리 내린 나무조차 연륜이 상당해 보인다는....





저마다 많은 사연이 담긴 기도에 열중이다




사람 손이 닿을만한 아랫쪽의 벽돌 사이사이 틈새로는 갖가지 애절한 기도를 적어 박아 놨다

시간이 지나 바닥에 떨어진 메모들도 수두룩 하다



남여간 사이를 가르는 판넬쪽엔 하루종일 기도에 전념하는 유다인들이 앉아서 기도인지, 공부인지.....

유단인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루종일 그들이 하는 일은 기도뿐이다.

유다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아직도 기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유다인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재정적 부담이 적이 않다고 한다


유다인 (jews, 히브리인)

      유대 지방에 기원을 둔 민족. 원래 북이스라엘 왕국 사람들에 대비되는 구성원을 의미했으며

전체 유대 민족은 바빌론 유수가 끝날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로 불렸다.

바빌론 유수 이후 유대교 신봉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예후디라는 용어가 쓰였는데,

이들만이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을 지켰기 때문에 예후다(유다)의 후손으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유대인' 개념에는 복잡하고 논쟁적인 인종문제와 종교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이스라엘 국민이 모두 유대인인 것은 아니다.

다음백과 참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7a1264a)




유대인을 대표하는 전통복장의 남자

검은 양복에 머리에 동그란 키파 (Kippa)를 쓰는데 이는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뜻으로 쓰고

정통 유대인은 항상 쓰고 다니며 특히, 양 귀위쪽에서부터 머리를 길러 꼬불꼬불 마치 구렛나루처럼 내린다

그 위에 중절모 모양의 챙이 넓은 모자를 또 쓴다


통곡의 벽에 들어갈때는 남자는 반드시 키파를 써야 한다.  일회용을 입구에서 팔기도...










통곡의 벽 현장을 방문, 열심히 기도하고 촬영하고 성곽의 남서쪽인 시온산에 위치한 마태의 다락방을 방문하기 위해

외곽에 지어진 성벽을 타고 걸어 이동...  근데 이 성곽벽이 성전벽인지 뭔지 모르것당


기드온 계곡 건너편 올리브산 위에  우리 숙소인 세븐아치 호텔이 선명히 보인다




오전엔 날씨가 좋았는데..... 점점 흐려지고 빗방울도 오락가락 바람까지....



계속 이어지는 예루살렘 성밖 사람사는 주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인구 밀집 지역이라서일까... 단층집이 거의 없다




관광용??






이어서 마태의 다락방 (마가의 다락방)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나와 시온 문으로 빠져 나가 약 100m 쯤 걸어가면 2층 석조 건물이 있어서 옥외로 난 돌계단을 올라 마태의 다락방을 찾을 수 있다.

수 백년 동안 줄이어 이 곳을 찾는 성지순례 객들의 발길에 닳아서인지 계단 돌들이 움푹 패어 있다.

로마네스크식 건축물인 다락방 내부는 천정이 아취식으로 되어 있다. 방 가운데 3개의 기둥은 주위벽에 서 있는 기둥들과 곡선으로 연결되어

아취를 이루며 천정을 받치고 있다. 이태리의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은 이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나누던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다 (막 14:15)


초기 기독교에서의 시온산은 매우 중요하여, 예수의 최후의 만찬 (막 14:12~25, 마 26:17~29)

마태의 다락방에서의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 (행 2:1 ~ 13)현장일 뿐 아니라,

AD 48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사도회의 (행 15:1 ~ 29) 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적 중심이 바로 시온이었으며, 이곳에 세워졌던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이방인 교회의 모교였다.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시온에로의 귀향'을 하나의 메시아 운동의 핵심으로 보았다.

즉, 그들은 하나임의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드신 다락방, 이곳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오순절 성령 강림의 큰 역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다윗왕의 무덤 (Tomb of King David)



2층에 있는 다윗의 가묘

석조 건물의 큰 석실 안에 있는 길이 2m, 폭 1m 정도의 석관은 아름다운 수를 놓은 천으로 씌어져 있으며

아름다운 은관에 보관된 유대교 성경 토라로 치장 되어 있다

천 위에는 '이스라엘 왕 다윗은 살아서 여기 있다'라고 히브리어로 수를 놓아 써 있고 유태인의 상징인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다.

이 묘는 기념 묘로서 실제 다윗 왕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곳은 이스라엘에서 서쪽 통곡의벽 다음으로 최고 성지중 하나로 꼽힌다

1172년에 투델라의 랍비 벤자민이 에루살렘을 방문 했을때 이 묘를 모시었다. 




다윗의 가묘. 남여 구분 가림막이 묘 중간을 가르고....




역시, 남여 구분된 기도 장소에서 기도중인 유대인 여자


손자 등살에 건물밖에서 기도중인 유대인